돈 막시미아노가 탄생하게 된 것은 에두아르도 채드윅 현 에라주리즈 오너에 의해서이다. 1983년 가업을 계승한 후, 보르도로 유학해 현대 와인 양조학의 아버지라 부르는 에밀 페이노 교수의 제자로 양조학을 공부했다.
보르도 특급 와인의 세계를 직접 접한 후 칠레 와인의 우수성을 증명할 아이콘 와인을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됐고, 1990년 그 첫 작품을 와인 가문의 초석을 닦은 5대조 할아버지에게 바친다. 이름은 돈 막시미아노 파운더스 리저브(Don Maximiano Founder’s Reserve)이다.
1990년대는 세계 와인 시장이 한 가지 포도 품종으로 만들어 저렴한 버라이탈 와인을 요구하던 시대로 칠레는 천혜의 자연환경과 저렴한 생산비로 가격 경쟁력이 높은 카베르네 소비뇽, 메를로, 샤르도네와 같은 와인을 대량 생산해, 하루 아침에 미국, 캐나다 시장에서 3위의 수출국으로 떠오르게 됐다.
칠레 와인 생산자들이 벌크 와인으로 거둔 성공에 취해있을 때, 채드윅 회장은 세계 유명 와이너리들과 경쟁할 수 있는 장기 저장이 가능한 고급 와인의 생산 필요성을 절감했다.
안데스 산맥의 가장 높은 봉우리이자, 남반부와 서반부를 통틀어 가장 높은 산인 아콩카구아 산 자락, 에라주리즈 가 소유한 포도밭 중에서 최고의 토양에서 안데스 산맥의 눈 녹은 물을 마시며 자란 포도나무에서 돈 막시미아노가 생산된다.
돈 막시미아노의 병 외관에서 느껴지는 중후함은 와인을 따르며 더욱 빛이 난다. 루비 빛이 감도는 아름다운 자주색을 띄고 있으며, 검은 베리류와 ‘까막 까치밥’이라 일컫는 카시스, 세밀하게 느껴지는 허브의 향의 복합미가 대단히 매력적이다.
이 와인의 가장 큰 매력은 프레쉬함과 과실 자체의 집중도 있는 깊은 맛이 산도와 함께 놀랍도록 밸런스가 잘 맞는다는 것이다. 와인 전문가들로부터 'a Big wine with Elegance'라 평가받으며 뛰어난 아로마를 인정받았다. 바디감이 좋은 와인이라, 대부분의 육류요리와 좋은 궁합을 이룬다.
돈 막시미아노라는 걸출한 와인을 만들었으나 세계 와인 업계에서 인정을 받는 일은 요원했다. 당시 칠레에서도 고급 와인이 나올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 아무도 인정하지 않았던 시대였다. 하지만, 1997년 첫 빈티지를 선보인 프랑스와 칠레의 합작 와인, 알마비바(Almabiva)가 프랑스의 와인 명가 바롱 필립 드 로칠드 (Baron Philippine de Rothschild)의 명성과 그들의 글로벌 영업망을 통해 세계시장에서 주목을 받는등 칠레 와인이 점점 관심을 모으기 시작했다.
에라주리즈는 돈 막시미아노 이후 세나, 비네도 채드윅, 라 쿰브레, 카이와 같은 아이콘 와인을 지속적으로 출시하며 칠레 와인의 고급화를 이끌었던 채드윅 회장은 2004년 획기적인 행사를 기획했다. 에라주리주의 아이콘 와인들과 보르도 1등급 와인, 이태리의 수퍼 토스칸 와인을 블라인드 테이스팅하는 '베를린 와인 테이스팅'이 바로 그것이었다.
세계의 와인 전문가들도 놀라워한 외롭고도 당찬 도전이 시작됐던 것이다. 2004년부터 2013년까지 10년 동안 유럽, 아메리카, 아시아 등 17개국에서 개최된 '베를린 와인 테이스팅'에서 에라주리즈의 와인들은 무려 9번 보르도 1등급 와인들을 물리치고 1등에 올랐다. 그 중에서도 5번의 영광은 돈 막시미아노에게 돌아갔다.
돈 막시미아노 와인을 생산한 에라주리즈 와이너리의 설립자 돈 막시미아노 에라주리즈(1832-1890)는 19세기의 인물이었다. 젊은 날, 구리 광산업에 투신하고, 가스 회사를 설립해 산티아고 시에 빛을 주었으며, 정계에서도 주요 인사였던 막시미아노 에라주리즈가 그 이름을 전 세계에 남기게 된 것은 그의 마지막 20년의 시간을 투자한 와인이었다.
그가 와인 생산업을 시작한 1870년 대는 프랑스 이민자들이 대거 유입돼 칠레의 와인 산업이 태동하는 시기였다. 프랑스 이민자들과 칠레 1세대의 와인 생산자들이 보르도와 유사한 토양인 산티아고 부근의 마이포 밸리에 집중하고 있을 때, 본능적으로 사업가 기질이 투철했던 막시미아노 에라주리즈는 어느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았던 새로운 지역을 찾아 나섰고 산티아고 북쪽으로 100㎞ 떨어진 아콩카구아 밸리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보았다.
1871년 당시 대통령 후보로 나섰던 형의 선거에 영향을 주지 않으려고 가족을 이끌고 프랑스로 여행을 떠난 그는 칠레의 와인 생산자로서는 처음으로 보르도를 방문했다. 보르도에서 직접 선정해 들여온 최고의 포도 묘목으로 아콩카구아 밸리에 포도밭을 조성했다. 5대에 이르러 오늘날 아콩카구아 밸리는 세계적인 와인 생산지로 인정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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